워렌버핏 이유없는 성공은 없다.
버핏은 <증권 분석> 출간 50주년 기념 연설에서 벤저민 그레이엄으로부터 시작된 가치 투자자들의 공통점에 대해 ‘가격과 가치’란 말로 표현했다. “그레이엄·도드빌 출신의 투자자들이지닌 지적 공통점은 이렇다.
기업의 작은 조각들이 시장에서 거래될 때, 이들은 그 조각의 가격과 그 기업의 가치 사이에 모순이 있는지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능적으로 이들은 주식을 월요일에 사는지 목요일에 사는지, 1월에 사는지 7월에 사는지 등을 중시하는 시장효율 이론가들과는 상관없이그 모순을 이용한다. 그레이엄·도드빌의 투자자들은 베타값이라든가 자본자산 평가모델 등에대해서는 물론 언급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이 투자자들은 오직 두 가지 변수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그것은 가격과 가치이다.
즉 가치에 비해 크게 할인되어 거래되는 주식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좋은 주식을 싸게 사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1달러 지폐를 60센트에산다면 1달러를 40센트에 사는 것보다 위험이 크지만, 보상에 대한 기대치도 후자 쪽이 더 크다.” 그는 이런 잣대를 가지고 기업을 평가했는데, 그가 매입한 기업들은 모두 신기술 업체들이 아닌 전형적인 굴뚝기업들이었다.
버크셔 헤더웨이가 사들인 1백여 개 기업들의 평균 설립연도는 1909년으로 모두 신경제에서 비켜난 기업들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모두 해당 분야에서 독점적 위치를 구축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업종도 다양하다.
그가 평생 보유 주식이라 부른 코카콜라부터 식품 도매회사, 조립주택회사, 캔디회사, 벽돌회사, 가구회사, 카펫회사, 맞춤액자회사 등 그가 투자한 회사들의 업종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있다면 유능한 경영진 을 갖고 있다는 점과 모두 해당 분야에서 독점적 위치를 구축, 매년 수익이 증가하는 회사라는 점이다.
” 시장에서는 가격과 가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계속 존재할 것이고, 그레이엄과 도드의 뜻을본받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번창해갈 것이다. ” 사실 버핏도 주식으로 돈을 벌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구사했다.
“나는 온갖 것을 다 해보았다. 차트를 수집했고, 기술적인 것들을 모두 읽었으며, 남의 정보에귀를 기울였다.”
이랬던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투자자의 가장 커다란 실수 한 가지는 가치가 아니라 주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주식으로 돈을 벌기 위해 온갖 것을 다 해본 버핏이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가치투자!!!~~혹시 그 속에 황금의 동굴에 이르는 길이 있는 게 아닐까?’
필자는 버핏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늘 이런 생각을 한다.
투자에 성공하기 위해서 반드시 로켓 과학자처럼 머리가 좋을 필요가 없다. 투자란 IQ 160인사람이 IQ 130인 사람을 물리치는 게임이 아니다. 그러나 이성은 필수적이다 무지와 빌린 돈을 합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습관의 고리는 도저히 깰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지기 전까진 너무 가벼워서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순전히 경제 동물만은 아니다. 그것이 실적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고재미있어하는 사람과 관계를 끊고 살아야 한다면 부자가 돼봐야 뭐 하겠는가? 우리는 돈 버는걸 좋아하지만 다른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돈 버는 걸 원치 않는다.
주식투자는 간단하다. 기업의 내재 가치보다 싼값에, 성실하고 능력 있는 경영진이 경영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기만하면 된다. 그리고 그 주식을 영원히 보유하고 있으면 된다.
나는 내 자식들이 하는 일을 존중하며, 내 생활 방식이 그들의 생활 방식보다 낫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가 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해주길 바라진 않는다. 내 유언장에는 자식들 중 누군가 나의 사업에 관심을 보이면 그에게 약간의 우선권을 주라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다. 우선권이라고 하지만 아주 약간의 우선권이다.
사람들은 서서히 부자가 되는 것보다 당장 다음 주에 복권에 당첨될 가망성에 더 큰 희망을 건다.
대중 연설을 할 때 무릎이 떨리는 걸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릎이 떨릴 때도 대중 연설 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 버핏은 대학을 마친 후 1백 달러를 내고 연설 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그는 말도 노력해서 배웠다. )
돈이 있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아주 재미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얼마나 건강하느냐는 돈이 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1)) 주식을 사업의 일부로 보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주식 시장이 내일부터 3년간 문을 닫는다면나는 어떤 기분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주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행복하다면 나는 행복한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투자에 있어 중요하다.”
2)) 시장은 당신에게 지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시장은 당신이 옳은지 그른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결과가 말해준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투자의 대가 벤저민 그레이엄에게서 배웠다.
3)) 여러분은 어느 주식이 가치 있는 주식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여지를 남겨둬라. 여러분이 어느 정도 잘못된 길로 갔다 싶으면 빨리 빠져나와라.”
4)) 똑똑한 사람들이 파산하는 가장 일반적인 길은 돈을 빌려서 하는것이다.”
5)) 주식은 여러분이 주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여러분은 주식에 대해 감정을 가지지만 주식은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감정적으로 주식을 거래해서는 안 된다.
”주식은 당신이 돈을 썼다는 것을 모른다.”
1930년 미국에서 증권 세일즈맨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워런 버핏은 컬럼비아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평가투자(value investing)라고도 불리는 과학적 주식투자 방법을 세계 금융계에 소개한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 1894~1976)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1956년 1백 달러로 주식투자를 시작, 한때 미국 최고의 갑부였으며 현재도 미국 5위 안에 드는 갑부인 워런 버핏은전설적인 투자의 귀재로 평가받고 있다. 워런 버핏은 가치 있는 주식을 발굴해 매입하고 이를 오랫동안 보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990년대 미국에 신경제와 인터넷 기술주가 급등할 때 ‘미국 주식은 80년대의 일본과 같이 버블로 터져버릴 것이다’라는 버블론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후 인터넷 주와 신경제에 대한거품론이 확대되고 나스닥 시장이 하락하자, 많은 인터넷 주의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내재 가치만을 따져 투자 종목을 선별했던 워런 버핏의 평범한 투자전략이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버핏은 뉴욕에서 2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자신의 고향 내브래스카 주 오마하를 거의 벗어나지 않지만, 주식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는다
해서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이라고도 불린다.
Warren Edward Buffett. 1930년 생. 명문대 출신 엘리트였으나 쥐가 나오는 월세 65달러짜리 셋방살이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 이후 투자사인 버크셔 해더웨이를 설립해 기적적인 주식 투자 수익률을 올리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돈이 많은 대부호가 된다. 그는 철저하게 주가가 아닌 회사의 고유 경쟁력과 가치로 판단하는 원칙 투자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가 “주식을 산다”는 소문만 돌아도 그 회사의주가가 급등할 정도로 혼자 힘으로 월스트리트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1930년 대공황 시기에 주식 거래상의 둘째 아들로 출생. 어릴 때부터 숫자와 셈에 비상한 능력을 보임.
6살 때 할아버지 가게에서 코카콜라 6개들이 세트를 사서 이를 사람들에게 낱개로 팔아 5센트의 수익을 올리는 비즈니스 수완을 보였음.
11살 때 처음 주식 투자를 시작, 시티 서비스라는 회사의 주식을 38달러에 구입함. 주식은 사자마자 27달러로 떨어졌고 어린 버핏은 크게 당황함. 그러나 그는 주식이 40달러가 될 때까지끈기 있게 기다렸다가 팔아서 이득을 얻음. 그러나 이 주식은 곧 200달러로 치솟았고, 버핏은 이때 “기다림”이야말로 투자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깨닫게 됨.
주식은 머리로 버는게 아니라 엉덩이로 번다는 속설도..
학교를 다니며 꾸준히 신문배달을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5천 달러를 모을 수 있었음.
(현재 가치로는 4만 2천 달러 정도.) 그는 이 돈으로 사업을 생각했으나 아버지의 고집으로 명문대(펜실배니아 대학의 와튼 비즈니스 스쿨)에 진학. 그러나 그는 자신이 교수들보다 더 많이안다고 생각, 와튼 스쿨을 그만 두고 고향 오마하로 돌아와 그곳에서 학교를 마친다.
역시 아버지의 고집으로 컬럼비아 대학원에 진학. 이곳에서 벤 그레이엄 교수를 만나 세계 최고 투자자의 자질을 닦는다. 그레이엄 교수는 수많은 투자의 경험을 통해, “주가와는 상관없이,오직 회사의 가치만을 보고 투자한다” 는 철통 같은 투자 원칙을 세운 사람이었다.
버핏은 그레이엄 교수를 평생 자신의 사업 모델로 삼는다. 버핏은 젊은 시절부터 당찬 데가 있었다. 그는 사업을 배우기 위해 어느 작은 보험회사 회장을찾는다. 그는 회장을 만나기 위해 약속도 없이 무작정 일요일 아침 기차를 타고 워싱턴 DC까지 달려간다. 그러나 회사 건물의 문은 잠겨 있었고, 버핏은 끈질기게 문을 두드려 건물 관리인을 불러낸다. 그리고 건물 안에 남아 있던 부사장을 찾아 4시간 동안 회사의 사업 전략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다. ( 버핏은 이때의 대화가 자신의 사업에 엄청난 도움이 됐다고 회상한다. 그는 오랜 세월 뒤 이때의 보험회사를 인수한다. )
대학원 졸업 후 지원했던 회사에 떨어졌고, 절망감 끝에 결국 아버지 회사에 취직한다. 그리고1952년 결혼,
한달 65달러짜리 월세 집에 살림을 차린다. 당시 이 집은 쥐가 나오는 등 허름하기 짝이 없는 최악의 주거 공간
이었다. 버핏 부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장롱으로 침대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젊은 시절 가난한 생활은 계속된다.
그는 투자에 계속 실패를 겪었고, 적은 월급을 보충하기 위해 오마하의 야간 대학 강의를 나가기도 했다.
(당시 버핏은 무대 공포증이 있어 강의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결국 버핏에겐 기회가 찾아온다. 그레이엄 교수가 버핏을 불러 함께 일하기 시작한 것. 이때부터 버핏은 그레이엄 교수의 투자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레이엄 교수로부터 회사의 경쟁력과 장래를 판단하는 법을 배웠고,9800달러를 투자해 14만 달러를 벌어 들이는 첫번째 성공을 거둔다. 1956년 그는 자신의 회사, Buffett Associates, Ltd.를 차리고 본격적인 투자 사업에 나선다. 그는 친척들과 사업 파트너십 제휴를 맺어 공동 투자를 했고(물론 투자 결정은 버핏 고유의 권한이었음), Dow 주식 시장에 투자해 251%라는 기록적인 수익률을 거둔다. 그의 이름은 고향 오마하에 널리 알려졌고, 그가 투자하면 반드시 벌어온다는 명제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1962년 투자 파트너가 크게 늘어 투자금이 720만 달러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후 10년간 1156%라는 어마어마한 수익률은 기록한다. 이는 당시 Dow 주식시장 전체의 성장 때문이기도 했으나, 이 기간 동안 Dow 주식시장의 성장률은 123%에 불과했다.1960년대 치솟기 시작한 주식 시장에 불안을 느끼고 파트너십 관계를 청산. 그는 1965년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라는 섬유회사를 인수,지주회사로 바꾸어 자신의 투자 사업의 기지로 삼는다.
버핏은 버크셔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투자했고, 이로써 파트너십을 이용한“펀드 매니저”에서 기업가로 새출발한다. 버크셔는 원래 망해가는 섬유회사였으나 버핏이 인수한 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투자회사로 변모한다.
버핏이 주인이 된 버크셔는 10년 만에 주가가 2600달러로 치솟았고, 1990년대엔 8만달러까지 기록한다.
버핏은 기업 가치 파악의 귀재였다.
그는 주가가 2달러까지 추락한 어느 망해가는 금융회사를인수했는데, 당시 그는 이 회사가 잘못된 경영으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지 사업 자체는 건강하다고 판단했다. 그의 말대로 이 금융회사는 버크셔에 인수된 뒤 구조조정을 통해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내는 알짜 금융 기업으로 변한다.
1970년대 말이 되자, 버핏이 투자한다는 소문만 돌아도 그 회사의 주가가 10% 이상 뛰어오르는 현상이 빚어진다. 버크셔 해더웨이의 주가는 290달러를 넘어섰고, 버핏의 개인 재산은 1억4000만 달러에 달한다. 버핏은 평생 자신의 회사 주식을 단 한 장도 팔지 않았다.
말인 즉, 그가 현금으로 들고 있는 재산은 매달 받는 5만 달러 월급 밖에 없다는 것.
그의 재산은 곧 버크셔 해더웨이였고, 그가 “수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버크셔가 벌어들이는돈이었다. 그는 부동산 투자도 하지 않았다. 주식 시장으로 이렇게 쉽게 돈을 버는데 뭣 때문에 부동산 투자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1980년대, 미국은 주식으로 한몫 크게 잡으려는 모럴 해저드가 만연한다. 이때 버핏은 “트렌드와는 반대로” 자선 사업을 시작한다. 버크셔의 자선사업에 동참하는 버크셔 주주들에게 주당 2달러의 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버핏은 수많은 돈을 자선 사업에 투자한다.
버핏은 코카콜라 주식에 엄청난 애착을 보였다. 1988년까지 그는 코카콜라 회사가 가진 주식의 7%를 소유했고(당시 시장가로 10억 2천만 달러에 달함), 이 주식은 3년 뒤 버크셔 회사의전체 주가 총액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게 된다.
1989년 버크셔의 주가는 8000달러를 돌파했고, 버핏의 개인 자산은 38억 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10년 뒤 그의 자산은 당시의 10배 이상인 400억 달러로 불어난다.
1990년대 닷컴 열풍이 불면서 미 주식시장은 다시 한번 거대 호황을 맞았으나 이번에도 버핏은 이런 호황을 외면하며 보수적인 투자를 계속한다. 그는 이때의 닷컴 호황이 곧 가라 앉을것이라 예측하면서 회사 본래 가치보다 저평가된 주식만 사들였다. 1999년 닷컴 붕괴가 일어나고 수많은 기업의 주가가 곤두박질을 칠 때 버크셔의 주식만은 오히려 0.5% 오르는 기현상을 보인다. 이로써 “오마하의 현인” 버핏의 이름은 다시 한번 전세계에 유명해 진다. 그는 “내가 모르는 종목엔 투자하지 않는다” 는 원칙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엄청나게 주가가 급등하는 종목이 있어도 결코 자신 판단에 주가 상승의 정당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결코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어느 CEO가 버핏과 골프를 했는데, 버핏이 2달러를 걸고 홀인원을 하면 1만 달러를 주겠다는 내기를 걸었다. 이때 버핏은 “이길 확률이 없는데 요행을 바라는 것은 투기꾼이나 할 짓이지 투자자가 할 일이 아니다” 라고 답했다고.
세계적인 부호가 된 워런 버핏. 그의 성공 비결은 “투기를 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